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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함 2023. 6. 7.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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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하늘과 가깝게 살 수 있다”


신선이 놀러왔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운 반암마을, 이곳에는 신선을 닮은 신부가 살고 있다. 선인처럼 멋스럽게 길러낸 수염과 편안하게 차려입은 개량한복, 인근 야산에 나름의 멋스런 쉼 공간을 만들어 놓고 산양과 닭, 개를 키우며 자연과 유유자적하고 있으니 신선이 더 어울리지 않은가. 성공회 신부를 도가의 신선에 빗대는 것이 어울리지 않지만, 그의 외모와 사는 모습은 꼭 신선을 닮아있다. 그가 바로 성공회 윤정현 신부이다.


영국 유학시절 논문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사상을 종교적으로 더 깊이 공부하고, 몸으로 느끼고 실천하며 삶속에 녹여내고자 고창에 내려온 지 약 5년여.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를 소개한다.


대한성공회 윤정현 신부는
고창에서 8남매(3남 5녀)중 4째로 태어나 대아초(6회), 고창중(20회), 고창고(50회)를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성공회대 사목신학연구원(사제 양성과정) 과정을 밟은 뒤 신부가 됐다. 자녀는 1남을 두고 있다.


첫 부임지는 1986년 서울교구 춘천교회이었다.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부장으로 파견나가 근무하다가 93년 9월 충북 청주 청원의 묵방교회로 전근하였다. 95년도에는 서강대 종교학과 대학원에 입학한 후 3학기를 다니다가 96년도 영국성공회 초청으로 버밍엄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2000년에는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국내로 들어와 정읍교회에 잠시 머물다가 유학을 마무리하기 위해 2001년에 다시 영국으로 건너간다. 이후 2002년 말 논문을 제출하고 들어와 정읍교회에서 1년간 더 관할사제를 지냈으며, 자활후견기관 관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2004년부터는 대전주교좌교회 주임사제로 6년간 근무를 하면서 성공회대학 신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했고, 이후 2010년 말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2010년에는 청주 수동교회 관할사제로 부임 받아 2015년 2월말까지 5년간 근무한 뒤, 퇴임으로 사제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2015년 3월 고창 아산면 반암마을에 정착해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사상 점검과 몸살림 운동을 통해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젓은 아니다. 지역에서 비슷한 고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며 함께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일의 일환으로 고창군립도서관 문화교실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의 도덕경 해석인 늙은이 풀이를 강독하는 길 위의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 강의는 지난 7월 2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시작되어 오는 11월 19일에 끝을 맺는다.


한편 성매매여성 구출과 미혼모 돌봄 등 여성인권운동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살아온 아내 덕분에 최근에는 갓난아기를 키우는 늙다리 아빠로도 살고 있다.


대한성공회 개혁의 중심에 서다.
윤정현 신부는 1982년 사제가 되기 위해서 성공회대(당시 천신대학) 사목신학연구원(대학원 과정, 1기)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 성공회는 서울, 대전, 부산 주교들 간 불협화음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교단총회인 전국의회가 유산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또 성공회대 내부적으로는 신학연구원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원장의 행태들이 문제제기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학과 성공회의 미래를 걱정하던 사목신학연구원(9명)들은 원장과 3교구 주교가 당시 사태를 책임져야 한다며, ‘천신(성공회대 이전 이름)의 내일을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성명서 발표와 함께 시작한 단식투쟁은 신학연구원 9명 전원이 참여했다. 그러나 투쟁인 진행되는 동안 한두 명씩 회유되어 마지막에는 단 2명만(윤정현, 이춘기) 남게 된다. 이들에게는 무기정학이 내려지고 그들이 머물던 기숙사는 강제 폐쇄가 됐다.


무기정학과 기숙사 폐쇄로 잠 잘 곳까지 잃은 이들에게 몇몇 교수들은 양동 색시촌에서의 빈민선교를 권유했으며, 9월 무기정학이 풀리기 전까지 그들은 그곳에서 6개월가량 생활하며 빈민선교를 진행했다.


학생들의 성명서 발표와 단식투쟁 이후, 여러 젊은 신부들과 전도사들이 신학생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성명서를 내며 성공회 개혁운동에 동참했고, 이후 발표했던 성명서는 미국의 켄테베리 대주교에게까지 전해졌다.


당시 한국 성공회는 선교 100년이 지난 상황이었지만, 교구가 독립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대한성공회가 3명의 주교로 인해 불협화음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학생들의 성명서 발표와 단식투쟁까지 이어짐에 따라 한국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켄테베리 대주교는 세명의 주교를 미국으로 불러 사직을 권고하기에 이른다.


세계성공회협의회에서도 한국 성공회 교회문제를 안건으로 다루었고, 회의 끝에 3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대만, 한국 홍콩교구를 엮어 동북아시아지역 등외관구로 독립할 것. 두 번째는 문제가 지속될 경우 독립을 해서 다른 교단으로 옮길 것. 세 번째는 일본성공회가 관구로 독립한 것이 오래 됐고, 교구가 11개나 되니 일본 성공회로 들어갈 것이었다. 세 번째 안은 일본에게 36년간 식민지를 겪었던 한국으로서는 매우 치욕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일본식민지로 다시 들어가라는 권고를 듣고 왔냐며 3주교 퇴진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3주교 모두 점차적으로 한명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또 이 투쟁 이후 90년도에 한국 성공회가 한국만의 독자적인 관구로 승인되어 현재 대한성공회로 독립하게 된다. 혈기왕성한 신학생들의 성명서와 단식투쟁이 불씨가 되어 대한성공회의 개혁과 관구독립이라는 큰 성과를 이뤄낸 셈이다.


성공회대 총장에 도전
윤정현 신부는 2016년에 성공회대학교 총장에 도전하게 된다. 당시는 성공회대학이 102주년을 맞은 해였다. 성공회대는 재단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이전까지 이사회에서 사제중 적임자를 선정해 총장으로 임명해왔다. 그러나 미래 국내 대학들이 처하게 될 예측환경과 개혁을 바라는 교수들의 요구에 의해 2016년에는 총장을 공모제로 선출하기로 했다.


성공회대 교수들은 대학의 개혁을 위해 함께 싸워줄 총장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중 적임자로 지목된 사람이 윤정현 신부였다. 사제자격이 있고, 겸임교수 경험으로 학교의 상황을 잘 아는데다가 개혁적인 인물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윤정현 신부는 처음 제안을 받고 거절했다고 한다. 개혁적인 사람을 재단에서 반길 일 없고,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수협회는 윤정현 신부를 지속적으로 설득했고, 고민 끝에 원서접수 마감일 하루 전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접수마감 뒤 확인 결과 지원자는 윤정현 신부 단 한명이었다. 재단에서는 지원자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교수협회의 의견을 들어주는 모양새를 갖춰 공모를 진행했는데, 전혀 예상 밖의 사람이, 그것도 다루기 곤란한 사람이 단수로 지원한 것이다. 당시 규정대로라면 윤정현 신부가 당연히 총장이 되어야 한다. 이에 당황한 재단 측에서는 급히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총장후로 여러 사제를 올려놓고 선정하기 시작했다.


재단이 무리수를 두자 총장공모가 파행으로 치달았고, 교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당시 서울 교구장 겸 재단 이사장인 김근상 주교와 윤정현 신부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사장의 각종 비리들이 윤 신부에게 제보되고 신문에 보도되면서 김근상 주교가 결국 1년 만에 불명예 은퇴를 하게 된다.


김근상 주교의 퇴진과 함께 윤 신부의 싸움도 끝났지만, 재단이사회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다른 사람을 총장으로 선임했고, 윤 신부는 애당초 총장에 뜻이 없었기에 미련을 갖지 않고 시골생활에 만족해하며 자연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선석농원에 그려나가는 영성공동체
고창군 아산면 반암마을 병바위 인근 야산에는 선석농원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산양과 닭, 개, 그리고 작은 전답과 2.5평 남짓의 고영재라는 쉼터가 한켠에 자리고 하고 있다. 선석농원은 반암마을 전설의 주인공인 신선의 ‘선’자와 윤정현 신부 자신이 흠모하는 유영모 선생의 호 다석의 ‘석’자를 한자씩 추려 선석농장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윤정현 신부가 일을 하다가 잠시 쉬거나 책을 볼 때, 또는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할 때 이용한다는 고영재. 숲속에 2.5평 남짓 컨테이너를 기본으로 외벽에 흙을 바르거나 돌을 쌓아 소박하고 아담하게 꾸며졌다. ‘그림자를 돌아 본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다. 산 여기저기서 조금씩 흐르는 물길을 돌려 작은 시내를 만들고, 중간에 연못을 만들어 잉어도 키우며 나름의 멋을 연출하고 있다.


기본 컨테이너 공간은 서재로 꾸며져 있고, 달아낸 공간은 현재 공사 중이다. 식수는 산위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호스에 연결해 끌어다쓰고, 전기는 태양광 충전등을 이용한다.
때문에 충전된 전력이 떨어지면 어두워지는 불편함이 있지만, 자연을 이용해 더불어 산다는 것에 나름의 의미를 두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유연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과거 성공회 내에서는 매우 거칠고 투쟁적인 삶을 살아왔던 윤정현 신부. 대한성공회 개혁의 역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입지적인 인물인 그가 5년 전 고향인 고창으로 내려와 한적한 시골 산골자기에 놀이터를 마련하고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유유자적하고 있다.


틈날 때마다 이곳에서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하늘과 가깝게 살 수 있다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사상을 직접 몸으로 점검하고, 지나온 삶의 모습을 천천히 되돌아본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연과 발맞추며 살아가고 있다.


윤정현 신부의 새로운 놀이터가 된 선석농원은 그가 고창에서 꿈꾸는 세상을 그려나갈 새로운 도화지이다. 이 도화지에 영성공동체라는 그림을 그려나갈 생각이다. 서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끼리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일구고 나누며 살아가는 그런 이상적 공동체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뜻이 이곳에서 이뤄지길 함께 기대해 본다.


안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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